곱슬머리인 채로 삽니다

내가 진심으로 생머리를 원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곱슬머리인 채로 삽니다
여자아이입니다. 오해 마세요.

어렸을 적 내 머리는 항상 짧았다. 통통한 얼굴에 숏컷을 한 채로 청 멜빵바지를 입은 나를 남자아이로 오해하는 어른도 많았다. 반면 두 살 많은 언니는 뽀글뽀글 긴 파마머리에 귀여운 치마를 입고 다녔다. 나는 언니가 부러웠다. 나도 마음껏 머리를 길러 봤으면. 파마도 하고, 양 갈래로 머리를 묶어 봤으면 하고 말이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든 건 타고난 내 모질 때문이었다. 굵고 곱슬곱슬한 데다 숱 많은 머리카락. 심한 곱슬기 때문에 머리는 늘 산만했고 관리가 힘들었다. 하나로 묶을 때 한 손으로 쥐기 어려울 정도로 숱이 많은 탓에 엄마는 일찍이 내 머리를 짧게 치기로 결정했다. 반면 언니는 모발이 얇고 숱이 적었기 때문에, 머리가 풍성해 보이려면 파마를 해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었다. ‘너는 숱이 많아서 머리를 밀 필요가 없었는데, 언니는 머리카락 많이 나라고 아기 때 머리를 빡빡 밀어줬어.’ 머리를 밀어주면 숱이 많아진다는 민간요법을 엄마는 철석같이 믿었다. 젊었던 엄마는 사랑하는 두 딸에게 최선의 솔루션을 찾아줬을 뿐이었다.

나는 구불거리고 어수선한 머리를 늘 부끄러워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부터 매직을 하기 위해 미용실을 찾았고, 그때마다 ‘숱이 너무 많다’는 미용사의 핀잔 아닌 핀잔을 들어야 했다.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건데도 나는 괜히 미용사에게 미안했다. 매직은 미용실에서 할 수 있는 시술 중 가장 오래 걸리는 축에 속하는데, 4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어린 나에게는 더 길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는  몇 달만 지나도 다시 지저분해졌고, 적어도 6개월에 한 번은 미용실 의자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성인이 되고 사는 곳, 하는 일 마저 바뀌었지만 매직을 하기 위해 미용실에 가는 루틴만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러던 지난 4월, 언니가 메시지로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어떤 여성이 자연 곱슬머리를 그대로 유지하며 사는 방법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컬리 걸 메소드’(Curly Girl Method)라 불리는 방법이었는데,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본연의 곱슬거리는 모질을 잘 살려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매직을 하지 않고 공들여 관리를 했을 뿐인데도, 일부러 파마를 한 듯 보일 정도로 머리의 컬이 예뻤다.

구불거리지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머리칼은 내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매직 비용은 결코 저렴하지 않기 때문에, 미용실에 내가 평생 쓴 돈만 해도 몇백만 원은 훌쩍 넘을 듯싶다. 하지만 이토록 큰돈을 단정한 생머리를 갖기 위해 쏟아부으면서도, 매직이 필요 없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곱슬머리는 악성이니까 없애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영상에 나오는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억울함을 이야기했다. 어떤 여성은 7살부터 지금까지 평생 매직 시술을 받았다고 했다. 강제로 펴지 않은 내 머리가 이렇게 멋진 줄도 모르고.

생기면 생긴 대로, 내가 가지고 태어난 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나는 왜 미처 하지 못했을까? 곱슬머리는 내 평생의 적이었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숨겨야 하는 약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곱슬이 예뻐 보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내 마음을 더 묵직하게 울렸다. 하긴 뭐, 내가 원했던 대학, 회사, 자격증. 이 모든 것이 내 본심만은 아니었다는 걸 작은 식당을 열고 나서야 깨닫지 않았던가. 그러니 가지고 싶었던 머리카락마저 진정으로 내가 원한 건 아니었다는 사실에 그리 놀랄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내가 진심으로 생머리를 원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언니의 격려와 영상 속 노하우를 용기 삼아, 나는 자연 곱슬머리로 살아보자 다짐했다. 가장 먼저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어릴 적과 달리 이번 숏컷은 매직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 아래 부분을 잘라내기 위함이었다. 처음엔 야생의 곱슬을 다루기가 아주 난감했다. 젖은 머리를 잘못 말리면 금방 부풀어 올랐고, 어떤 크림을 발라야 할지 정보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적응이 되어서 ‘파마가 잘 어울리네요’ 칭찬도 종종 듣는다. 그럼 나는 ‘이거 제 원래 머리예요!’하고 자랑스럽게 답한다.

나는 지금의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나만의 고유한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는 저항의 기운이 느껴져서 더욱 좋다. 진짜 내 모습을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들 수도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곱슬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다시 한번 더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