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

<화 좀 안 내고 살 수 없을까?> 1편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
저희 두 사람 (대체로) 사이 좋습니다.♥

English translation is here.

화가 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아마도 사소했을 것이다. 가령 강단이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 물기를 닦지 않았다거나, 그릇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서 내가 다시 정리해야 했다거나, 내 아이디어에 강단이 시시하게 반응해서 속상했다거나 하는 별스럽지 않은 이유. 식당 동업을 결심하고 우리 부부는 자질구레하게 다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다가 방심한 순간 말다툼이 시작됐다.

우리 커플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화가 단단히 난 나와 강단을 본다면 ‘누구세요?’라고 물을 것이다. 화가 난 강단은 ‘과묵한 고등학생’ 같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이 싫어서 입을 꾹 닫고 있지만, 화가 났다는 표를 얼굴에 써 붙이고서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다린다. 그는 관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잔소리는 죽을 만큼 싫다. 반면 나는 화가 나면 ‘자식 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스타일로 변한다. 내 마음속에는 이미 정해진 정답이 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할 듯 대화를 시도하지만, 대화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표정이 구겨지고 목소리는 높아진다.

‘과묵한 고등학생’ 대 ‘자식 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싸움이라니. 꾹 참고 싸우다가도 버럭 화를 터트리는 사람은 항상 나였다. 그래서 자주 억울했다. 본질을 잃고 말꼬리 잡기로 이어진 다툼이 끝나면, 남는 건 내가 뱉은 날 선 말뿐이었으니까.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었다. 화가 나서 쏟아낸 내 말이 강단에게 큰 상처를 줬고, 선을 넘은 나는 대역 죄인이 됐다. 화를 참지 못한 죄의 여파는 너무나도 컸다. ‘화내서 미안해. 근데 너도 잘못했잖아!’라고 하기에 나는 너무 못난 싸움꾼이었다.

그날의 싸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으로 번져갔다. 반복되는 패턴에 따라 내가 강단에게 버럭 화를 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두 가지 다른 점이 이날을 글의 소재로 삼게 된 이유다. 첫 번째는, 내가 강단에게 욕을 했다는 것이다. 아, 이 글을 쓰면서도 너무 부끄럽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부끄럽다는 생각의 ㅂ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아주 뜨거운 불 속에 서 있었다. 너무 뜨거운 나머지 강단이 받을 상처는 중요하지 않았고, 내 머리는 어느 때보다 쌩쌩 돌아가면서 강단에게 상처 줄 말을 골라내고 있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자리에 우리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아빠. 여느 때처럼 커피나 한잔 얻어먹을 심산으로 가게에 들른 아빠는 부부 싸움 생중계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물론 강단은 아빠를 보자마자 싸움을 멈추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있든 말든 너 하고 싶은 말이나 하라’며 그를 몰아세웠다. 정말 하면 안 되는 짓이었다. 사이가 좋은 줄 알았던 딸과 사위가 미친 듯이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을 본 아빠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화내는 걸 싫어하는 강단이 장인 앞에서 바닥을 보였으니 얼마나 비참했을까.

결국 아빠는 민망함에 자리를 떴고, 강단 역시 곧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녁 영업은 나 혼자 했다. 화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미안함과 죄책감, 창피함이 몰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달려가 당장 사과하고 싶었지만, 나는 가게에 남아 저녁 장사를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반성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강단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이다. 가능하면 그를 큰 투명 공에 들어가 살게 하면서 외부 유해 요소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고 싶을 정도로, 나에게 강단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런 사람에게 지금껏 다른 누구에게도 준 적 없는 상처를 줬다니. ‘나는 왜 그렇게까지 강단에게 화를 냈을까.’ 거듭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분명 나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21세기 현대인답게 유튜브 앱을 열고 ‘화 참는 법’을 검색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검색 결과를 보면서 나 같은 욱쟁이가 세상에 많다는 사실에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영상 속 전문가들은 화 가라 앉히는 방법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욱하는 사람 절대 안 변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욱하는 애인이라면 당장 헤어져라’. 이게 댓글 창의 여론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영상 속 남자는 나와 비슷하게 가족들 앞에서 화를 다루는 것을 유독 어려워했다. 그랬던 그를 바꿔놓은 건 아내의 진지한 질문이었다. ‘당신, 나한테 화내는 것처럼 oo 형한테도 그럴 수 있어?’ (oo형은 그가 오래 알고 지낸 가까운 형이지만 서로 조금의 예의를 갖추는 사이라고 했다) 아무리 상상해 봐도 남자는 그 형에게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깨닫는다. 화를 조절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는 화낼 대상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있었다.

‘가족이라서 오히려 화를 내도 된다고 생각했구나. 단단한 우리의 관계가 이 정도 분노는 견뎌 줄 것이라 생각했구나. 그러니까 나는, 강단이 만만했구나.’ 이런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나는 내가 돌연 싫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개운했다. 불치병이라는 소리만 듣다가 정확한 진단명을 알게 되고, 사실 내 병의 원인이 아주 확실하며 치료법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기분이랄까.

화는 한자로 불 화자를 쓴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불길처럼, 한 번 화가 나면 어쩔 줄 모르게 된다는 비유로 보인다. 하지만 화의 주인은 언제나 나다. 화를 낼 대상을 내가 선택한 거라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에 불이 붙지 않도록 화재 예방에 애쓰고, 불이 나면 재빨리 끄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화로부터 주도권을 되찾아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오늘 작은배 레터, 어땠나요?

제주에 비가 많이 옵니다. 하루 이틀은 시원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5일째 비를 보고 있자니, 뚜렷했던 과거의 사계절이 문득 그리워지네요.

소신의 <글 쓰는 아침> 유튜브 라이브 방송 8일 차에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얼마나 쓰려나 싶었는데, 웬 걸요. 지난 일주일간 정말 많은 글을 썼습니다. 이번 레터도 매일 아침 조금씩 써서 완성했고요. 요즘은 아침에 혼자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좋아요.

오늘도 작은배 레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기운이 없는 어떤 날에는 손님께서 남겨주셨던 레터 후기를 꺼내 읽습니다. 여러분의 안부 인사는 언제나 반가워요.🌞


⛴️ 작은배 이모저모

  1. 강소팟 15화를 업로드했습니다. 괄호 시리즈 (창작) 편으로, 우리 삶에 소비보다 창작이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작든 크든, 무언가를 창작 중인 분이라면 공감하실만한 내용이에요. 지난 작은배 레터 <창의적인 사람은 무엇을 할까?> 시리즈의 후속담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 강소팟은 애플 팟캐스트스포티파이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2. <다 읽은 책 정거장 2회> 아주 작은 책방의 주인을 모집합니다. 누구나 책방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청서를 제출하고, 임대료를 낸 후, 책을 보내 주시면 저희가 대신 팔아드려요. 택배 전달도 가능하니 많은 신청 부탁드립니다.
  3. <책과 나 3-4월>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푹 늘어질 수 있는 봄날의 토요일, 읽을 책 가볍게 챙기고 작은배 사무실을 찾아 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준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