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이 아닌 치지레이지

정해진 영업시간에 정해진 메뉴를 파는 구조를 넘어설 수는 없을까?

음식점이 아닌 치지레이지

제주로 돌아오자마자 종일 가게를 쓸고 닦았다. 거세게 다녀간 태풍 탓에 유리창 먼지 얼룩이 심해서 한참을 닦아내야 했다. 청소를 마치고 반제품까지 만들고 나서야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한 달 반이라는 공백이 무색하게도 치지레이지는 금세 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가게를 비운 동안 종종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게보다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약 없는 휴무를 공지하는 일이 마음에 편할 리 없었다. 몇 번의 휴무 공지를 반복하면서 '사장이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 구조의 한계를 제대로 체감하기도 했다. 물론 주인이 직접 일하는 가게를 꿈꾼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일과 삶을 저울질 해야 하는 현실이 야속했다. 우리가 하는 업의 본질과 한계를 제대로 느낀 시간이었다.

그럴 때 위로가 된 건 다름 아닌 치지레이지 '블로그'였다. 한 번은 쿠드비건 인스타그램에서 우리의 블로그를 소개해주셨는데, 음식점이 아닌 블로그라는 정체성으로 비치는 일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비록 가게 문은 닫혀있지만 지금껏 쌓아 온 글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아직 가게에 다녀가신 적은 없지만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치지레이지를 알고 있던 손님들이 위로와 격려를 전해주시기도 했다. 시간을 들여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나누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음식점이 아닌 치지레이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영업시간에 정해진 메뉴를 파는 구조를 넘어설 수는 없을까? 음식 말고 치지레이지가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확실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의 한계를 딛고 치지레이지의 방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음식점이라는 구심점을 단단하게 두고 재밌는 프로젝트를 덧붙여 가고 싶다.

가게 문을 다시 열면서 휴무일을 주 2일로 늘렸다. 휴무일 변경은 매번 고민만 해왔는데, 새로운 시도에 시간을 쏟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결정이 쉬웠다. 조금 일하고 조금 벌겠다는 단순한 마음이 아니다. 새롭게 생긴 하루의 휴일은 치지레이지의 다음을 고민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데 쓸 작정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치지레이지가 식당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단단한 발판을 만들고 싶다.

식당을 넘어선 치지레이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정해진 영업시간에 정해진 메뉴를 파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간을 들여 노력한다면 언젠가 현실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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